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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커신academic blog/소 잃고 물 붓기 2023. 10. 26. 14:00
프롤로그
다시 하게 된 수학 공부
"커. 커." 낯선 목소리가 남자의 귀에 들렸다. 그러나 남자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일어나질 않았다.
"이봐, 커! 일어나!" 낯선 목소리가 더 크고 시끄럽게 들렸다. 그리고 투박한 손이 남자의 어깨를 흔들었다.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는 곳을 보았다. 그는 자기 바로 앞에, 나이가 아주 많고 키가 아주 작은 한 남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메뚜기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는 그 남자는 의료 차트 같은 것을 손에 쥐고 있었고, 차트지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그는 남자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안녕, 나는 길잡이 귀신이야. 넌 이승에서의 삶을 방금 마감했어." 길잡이 귀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한 뒤 차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잠이 완전히 깬 남자는 주변을 살펴보며 어떻게 된 상황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울 수 있어, 커. 다들 그래. 나는 네 죽음을 맡은 귀신으로서, 널 사후 세계로 안내하고, 네게 적절한 임무를 주려고 왔어. 잠시만 기다려. 먼저 네 일생을 한번 훑어보도록 하지." 필기를 마친 길잡이 귀신은 차트를 빠르게 맨 앞장으로 넘겼다.
"음... 본명은 Mozaranda Kerr. 1995년 독일 태생, 만 29세 사망.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살다가 아무 것도 이뤄내지 못하고 지냈군.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4일 동안 침대 위에서 잠만 자다가 사망했다니, 흔치 않은 경우군. 취미는 잘하지도 못하는 게임이었고, 연애는 한 번도 안 했어. 친구도 별로 없었고, 가족과도 거의 연락을 안 했다... 흠... 정말 지루한 삶이었겠어. 아니, 이건 삶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삶 수준인걸? 넌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은 것과 다름없었어! 정녕 모자란 삶을 살았군, 모자란다 커."
모자란다는 귀신의 말에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을 뿐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길잡이 귀신에게 말했다.
"네가 무슨 권리로 내 삶을 판단하는거야? 내가 남들처럼 특출 난 재능 하나도 없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아왔는 줄 알아? 난 내 환경에선 최선을 다했어!"
길잡이 귀신은 모자란다의 항변에 침착하게 답했다.
"이승에서 살면 자기 자신이 어떤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차리기 힘들지. 하지만 모든 인간은 적어도 하나의 분야에선 주어진 재능이 있어. 너도 마찬가지고, 커." 길잡이 귀신은 페이지를 몇 장 넘기더니, 모자란다의 얼굴 앞에 어떤 표를 들이밀었다. "이게 네게 선천적으로 주어졌던 재능과 장애들이고, " 그리고 차트 옆 쪽 잔뜩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뒤적거리더니 종이를 한 뭉텅이 넘겨서 다시 모자란다의 얼굴 앞에 또 다른 표를 들이밀었다. "이건 몇 시간 전에 생을 마감한 어떤 교수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졌던 재능과 장애들이야. 너와 정말 비슷한 선천적인 조건에서도 멋진 영화 같은 삶을 산 인간이었지."
분명 두개의 표의 내용은 언뜻 보기엔 비슷해 보였지만, 모자란다의 억울함은 가시질 않았다. 그는 눈물이 날 듯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뭐라도 변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말주변은 모자랐다.
"넌 네 삶을 낭비했고, 스스로 네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지 못했어." 길잡이 귀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널 벌주러 온 건 아니야, 커. 네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았더라도 상을 주지도 않았을 거야." 길잡이 귀신은 자리에 앉았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 의자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모자란다의 침대 옆에는 한 사내가 나무 의자를 모자란다의 방향으로 당겨서 자리를 고쳐 앉고 있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승에서 어떤 삶을 살았든, 그건 저승에서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아. 누구도 이승에서의 선행에 대해서 상을 주지도 않고, 이승에서의 악행에 대해서 벌을 주지도 않지. 여기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어, 커. 사랑하는 가족이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고 올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루하게 기다릴 수도 있고,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닐 수도 있어.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승에서 아쉬웠던 것들을 저승에서 이루려고 해. 모자란 인생을 살아온 너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난 그래서 네 저승에서의 삶을 네 스스로 만족하며 살 수 있게 도움을 주러 온 거야, 커. 넌 여기 저승에서 새로운 직업을 갖고, 네가 이승에서는 발휘하지 못했던 네 잠재력과 가능성을 맛볼 수 있지."
모자란다는 길잡이 귀신이 자신을 벌하고 지옥으로 데려갈 저승사자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살짝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길잡이 귀신의 말투는 묘하게 거슬렸지만, 어차피 그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막상 그 다음 뭘 해야 할지는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모자란다는 길잡이 귀신의 말을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넌 이승에서 기회가 있었어, 커. 네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학교도 갔었는데, 마음에 드는 이성 동급생만 쫓아다니고 수업 때에는 잠만 자다가 학점과 교우관계를 모두 말아먹어버렸단 내용을 네 인생 요약서에서 봤어. 마음껏 불같은 사랑을 하다가 운이 좋지 않게 사망한 경우는 봤어도, 너 같은 경우는 정말 처음 보는 것 같군. 하지만 이렇게 모자란 너 같은 인간도, 저승에서는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해보지 못한 공부를 여기서 다시 해볼 수 있을 거야."
모자란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길잡이 귀신을 바라보았다. "공부? 죽어서도 공부를 해야 하나? 내가 특별히 공부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길잡이 귀신은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모자란다를 쳐다보았다. "넌 선천적으로 수학에 재능이 있어, 커!" 길잡이 귀신은 모자란다가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네가 공부를 대학 시절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를 했다면 네가 원했던 '남들만큼 평범한 인생'은 살고도 남았을 거야!"
모자란다는 이런 조그만 난쟁이 따위가 감히 자기한테 덤벼들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우선, 블러웬루벤 대학 수학과에서의 삶은 정말 끔찍했어."
"그래? 햄스터 같이 생긴 귀여운 빨강머리 여자애를 쫓아다니던 게 끔찍했던 건 아니고?"
모자란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지. 저승에서는 지금 '수학 귀신'에 지원할 유령들을 모집하고 있어. '수학 귀신'은 수학을 포기한 어린 학생들의 꿈에 나타나서 그들이 수학에 공포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해. 이 역할을 맡기 위해선 직업 훈련 과정이 필요해. 머리만 커버린 너의 모자라는 수학 실력으로는 절대 '수학 귀신'이 될 수 없거든. 하지만 넌 충분히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수학 낙원'에서 우리한테 연락했고, 그래서 내가 너에게 정보를 주러 온 거야. '수학 천국'은 조용하게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기 좋은 곳이지. 블라바루바 대학인지 뭔지도 네겐 좋은 기회였겠지만 '수학 지옥'은 네게 더욱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수학 귀신'이라고?" 모자란다가 물었다. "독일의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작가가 짓고 로트라우트 수잔네 베르너 작가가 삽화를 맡았으며 1997년에 출판, 동양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같은 해 12월에 비룡소라는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출판된 <수학 귀신>이라는 책에 나오는 그 '수학 귀신'을 말하는 건가? 그게 진짜 실존하는 내용이었어? 그래서 내가 가야 할 곳이 '수학 낙원'이야, '수학 천국'이야, 아니면 '수학 지옥'이야? 셋 중 어디라는 거야?"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나 보군, 커. 독해력 마저 모자라다니." 길잡이 귀신이 또 묘하게 거슬리는 말투로 말했다. "'수학 낙원'이니 '수학 천국'이니 '수학 지옥'이니 하는 건 이름만 다를 뿐이지 결국 서로 같은 거야.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적 원리도 어린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뛰어난 수학 귀재들이 있는 곳이지. 어때, 이승 때의 삶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낼 수도 있겠지만, 이승에서 제대로 못해본 경험을 저승에서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어?"
모자란다는 길잡이 귀신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지겨운 삶에 방향성이 주어지는 것이 그다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승에서도 무언가 특별한 일거리가 주어지길 바라곤 했다.
"좋아. 난 '수학 귀신'이 되겠어. 그럼 '수학 낙원'인지 '수학 천국'인지, 거길 어떻게 가지?"
길잡이 귀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트를 모자란다의 침대 옆 탁자에 두었다. 차트는 스르륵 투명해지며 사라졌다."다행이야, 가끔씩 스카우트를 거절하는 유령들 때문에 헛걸음을 할 때도 있거든. 네 결정을 축하하지. 그리고 난 널 '수학 지옥'으로 데려다주고, 다음 일을 하러 가겠어. 준비할 건 딱히 없겠지만, 준비는 됐니?"
모자란다는 길잡이 귀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바로 가보자구. 내가 수학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확인해 보지."
길잡이 귀신은 모자란다 옆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제 금방 갈 거야. 그러면 이제 내 어깨 위로 올라가!"
모자란다는 거의 서른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가냘픈 늙은 남자의 등에 타는 것이 어색했지만, 이내 두 남자의 몸이 떠오르자 모자란다는 덜컥 겁이 나서 길잡이 귀신을 꼬옥 붙잡았다. 길잡이 귀신은 모자란다를 업은 채로 공중으로 솟아 날기 시작했다.
수학 커신의 수학 노트
길잡이 귀신이 데려다준 곳은 길게 뻗은 화려한 궁전이었다. 사방이 환한 불로 밝게 빛나고 있었고, 어느 한 건물을 들어가 보니 안내원 같이 생긴 귀신들과 그들 앞에서 상담을 받는 유령들이 보였다. 모자란다는 길잡이 귀신에게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하려 했으나, 길잡이 귀신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모자란다는 대기표를 받고 잠시 기다리다가, 그를 부르는 안내원 귀신 앞에 다가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2023년 10월 25일 오후 6시 23분에 사망하신 모자란다 커씨 맞으시죠? 저희 모임의 정식 회원으로 등록되셨습니다. 이제 외부에서 활동하실 경우를 대비해서 별명을 지어주셔야 합니다. 수료생들은 '수학 귀신'으로 임명되지만 아직 견습생이시기 때문에 '수학 귀신' 말고 다른 활동명을 사용해주셔야 해요." 안내원 귀신은 모자란다의 앞에 펜과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모자란다는 잠시 고민하다가 안내원 귀신에게 물었다. "혹시 '수학 커신'은 되나요? 딱히 특별한 별명은 안 떠오르는데, 제 성이 '커'씨여서요."
안내원 귀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시 컴퓨터를 쳐다보았다. 규정집을 확인하는 듯했다. "네, 됩니다. '수학 커신'으로 등록해 드릴게요."
그렇게 모자란다 커는 '수학 커신'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학 커신은 안내원 귀신으로부터 받은 반짝이는 새 회원증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수학 책들을 중 눈에 띄는 책들을 골라 대여 바구니에 담았다.
수학 커신은 빈자리에 앉아, 자신이 받은 새 공책을 펼쳐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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